'콘크리트 유토피아', 인간 본성의 깊이를 그리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엄태화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재난 드라마입니다. 엄 감독은 2013년 독립영화 『잉투기』로 데뷔해 독창적인 시선과 섬세한 연출력을 인정받았으며, 이후 『가려진 시간』 등에서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보적 감각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번 작품에서는 거대한 재난 상황을 통해 인간 본성과 권력 구조를 심도 있게 탐구하며, 단순한 재난물이 아닌 철학적 메시지를 담은 사회 드라마로서의 무게감을 전달합니다.
폐허 속 아파트, 새로운 권력의 시작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2023년 8월 개봉한 한국 재난 드라마 영화로, 김숭늉 작가의 웹툰 『유쾌한 왕따』의 일부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전 세계적인 지진 이후 무너진 서울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건물, ‘황궁 아파트’ 103동을 배경으로 생존자들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그립니다. 이병헌, 박서준, 박보영 등 충무로 대표 배우들의 강렬한 연기와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구성으로 개봉 당시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살아남은 자들의 선택
서울 전역이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뒤, 황궁 아파트만이 유일하게 붕괴되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그곳에는 기존 입주민들과 이주해 온 생존자들이 몰려들며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초기에는 모두가 협력하며 생존을 도모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외부인의 존재가 입주민들에게 위협으로 인식되며 점차 배제되고, ‘우리’와 ‘남’의 경계가 생겨납니다.
이 와중에 입주민 대표로 선출된 **김영탁(이병헌 분)**은 질서를 유지하겠다며 규칙을 만들고, 아파트의 자원과 거주 권리를 통제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권력은 점차 독재적으로 변화하고, 반대하는 이들은 제거되거나 고립되며 ‘유토피아’라는 명목 하에 억압적인 시스템이 구축됩니다.
영탁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나며 내부의 균열은 커지고, 그의 리더십에 의문을 품은 **민성(박서준 분)**과 명화(박보영 분)는 다른 선택지를 모색하게 됩니다. 영화는 점차 공동체의 붕괴, 인간 본성의 드러남, 그리고 집단 이기주의의 끝을 향해 나아갑니다.
이상향은 어떻게 무너지는가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재난’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 본질은 철저히 ‘인간’을 이야기하는 영화입니다.
이병헌은 독재자이면서도 어디까지나 현실에 타협하고자 했던 인물 ‘김영탁’을 섬세하게 연기하며, 관객이 선뜻 미워하지 못하게 만드는 복합적인 감정을 유도합니다.
그는 단순한 악인이 아니라, 우리가 현실에서 마주할 법한 ‘지도자’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그려냅니다.
박서준은 억눌린 양심과 집단 속에서의 갈등을, 박보영은 이타적 이상주의자로서의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며 극의 중심을 단단히 지탱합니다.
특히 박보영의 연기는 소소하지만 묵직한 울림을 남기며, 관객에게 마지막까지 질문을 던지는 캐릭터로 작용합니다.
미술과 세트 또한 뛰어납니다. 무너진 도시와 폐허 속 아파트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긴장감은 실제보다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며, 관객은 영화 속 인물들과 함께 갇힌 듯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음악은 과하지 않게, 하지만 정확한 타이밍에 감정을 증폭시킵니다.
다만, 영화의 구조나 주제가 다소 무겁고, 전반적인 분위기가 암울하여 호불호는 갈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영화가 의도한 충격과 사유의 깊이를 생각했을 때 필연적인 선택으로 볼 수 있습니다.
총평 – 재난 이후의 진짜 위기는 인간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단순한 재난 영화가 아닌, 재난 이후의 인간 군상극을 밀도 있게 그려낸 사회적 드라마입니다.
한정된 공간과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과 사회 질서, 권력 구조를 날카롭게 파고들며 관객에게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병헌의 연기, 엄태화 감독의 연출력, 그리고 고도의 상징성이 결합된 이 작품은 한국형 재난 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보여주었으며, 단순히 소비되는 오락물이 아닌 오래 곱씹을 가치가 있는 영화로 기억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