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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일럿>은 단순한 위장 취업 코미디가 아니다. 이 영화는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한정우’들에게 보내는 이야기이며 ‘실력보다 조건’, ‘진심보다 자격’이 앞서는 시장의 냉혹함을 풍자하는 동시에 ‘나는 누구로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본질적 질문을 던지고 다.
이야기의 시작은 뜻밖에 단순하다. 한때 능력을 인정받던 민항기 조종사 ‘한정우’(조정석)는 갑작스러운 구조조정으로 인해 실직하고, 재취업을 위해 수십 번의 이력서를 넣지만 나이, 공백기, 이전 회사 평판 등 눈에 보이지 않는 벽에 계속 부딪힌다.
그가 가진 ‘경험’과 ‘실력’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카드가 되어버렸다. 능력이 있음에도 기회를 박탈당한 한 남자의 현실은, 그 자체로 많은 이들에게 씁쓸한 공감을 자아낸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이혼한 아내의 여권과 신분 정보를 접한 그는 실력은 자신과 같은데 조건만 다른 그녀의 경력을 이용해 ‘한정미’라는 여성 조종사로 위장 입사에 성공한다. 그 순간부터 <파일럿>은 한 남자의 ‘가짜 인생’에 대한 이야기로 들어간다.
코미디의 외피, 휴먼 드라마의 심장
표면적으로 <파일럿>은 매우 유쾌하고 재치 넘치는 영화다. 조정석 특유의 능청스럽고 찰진 연기 덕분에, 한정우의 거짓말과 고군분투는 관객에게 끊임없는 웃음을 준다.
특히 기내 방송 톤을 흉내 내는 장면, 여성 조종사로 위장하며 다리 각도를 바꾸거나, 가발 때문에 생기는 해프닝 등은 매 장면이 살아 숨 쉬는 듯한 코미디 타이밍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웃음의 바닥엔 한 인간의 깊은 외로움과 절박함이 깔려 있다. 그는 실업자이자 이혼남, 딸과의 관계도 어색해져버린 아버지이며, ‘누구도 원하지 않는 존재’로 전락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거짓말은 단지 웃기기 위해 만들어진 장치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절박한 생존 수단이다. 그 점에서 영화는 단순한 희극이 아닌, 현실에 발붙인 비극에 가까운 휴먼 드라마다.
‘자격’이 진심을 가로막는 시대
한정우는 진심으로 다시 비행기를 몰고 싶어 한다. 그는 실력을 갖췄고 비행이라는 직업에 사명감도 있다. 하지만 세상은 그의 내면보다 서류상의 조건과 이력서의 한 줄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특히 항공사 인사팀의 대사 중 “여성 파일럿도 적극 채용 중입니다.”는 말은 그가 ‘여성’이라는 조건을 위장해야만 했던 이유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정미는 실력이 아닌 ‘채용 타깃’으로 선택된 것이다.
이 설정은 실력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정작 조건과 겉모습에 따라 기회를 나누는 사회 구조를 날카롭게 꼬집는다. 또한 남성과 여성 모두가 그 구조 속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불합리함을 경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정우는 왜 거짓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을까?
그의 위장은 단순한 사기극이 아니다. 그는 처음부터 누군가를 속이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증명받고 싶어서 가짜 신분을 썼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정우가 거짓말을 할수록 오히려 더 진심을 다하게 된다는 점이다. ‘한정미’라는 이름으로 비행에 나선 그는 비상상황에서도 침착하게 대처하고, 동료들과도 진정성 있는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모든 진심은 거짓의 껍데기 속에서 이뤄진 것이기에 그를 괴롭게 만든다. 웃고 있지만, 눈빛은 슬프고 인정받지만, 스스로는 죄책감에 무너져간다.
‘진짜 나’로 돌아가기까지의 용기
영화는 결국 정우가 자신의 정체를 고백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는 장면에서 절정을 맞는다. 그 순간은 단지 거짓말이 들통난 게 아니라, 한 남자가 다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세상과 맞서는 장면이다.
그는 일자리를 잃고, 동료들에게 실망을 안기고, 세간의 조롱거리가 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순간부터 처음으로 당당하게 서게 된다.
그리고 그를 지켜본 딸은 아버지의 잘못 보다 그 잘못을 인정한 태도에 감동하고, 비로소 그의 손을 다시 잡는다.
마무리하며: ‘웃기지만 아픈 영화’
<파일럿>은 겉으론 유쾌한 오락영화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짜와 진짜 사이, 조건과 실력 사이에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갈등과 자기 검열을 하고 살아가는지를 묻는 영화다.
조정석의 연기는 단순히 웃기거나 감동적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그는 한정우라는 인물을 통해 현대인의 불안, 가면, 그리고 회복을 설득력 있게 표현했다.
우리가 이 영화를 보며 웃을 수 있었던 건, 한정우의 거짓말이 어딘가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눈물짓게 된 건, 그가 다시 진짜 자신으로 돌아가려는 용기에 조용히 박수를 보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진짜 자신으로 살고 있나요?